* 50㎏ 이하 각광… 잘 나가는 스타들 연수입 2억 넘어
지난 96년 6월 23일 과천의 서울경마장.  9마리의 경주마가 발주기를 벗어난 후 뒤처진 한 경주마가 요동을 치며 날뛰더니 기수를 경주로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 기수는 불행하게도 맨홀의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숨졌다. 그는 한국 경마 사상 가장 단신(144cm)이고 촉망받던 신예 이준희 기수였으며 그의 순직은 많은 경마팬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에 앞서 91년 11월엔 김태성 기수가 낙마로 사망했고, 92년 11월엔 김종온 기수가 척추를 다쳐 불구가 되었다.
시속 60km대의 모래주로를 달리는 기수라는 직업은 이처럼 위험한 탓인지 과거엔 관심이 적었고 인기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경마 규모가 커지고 팬들의 수준이 향상되면서 기수는 각광받는 직업 중 하나로 떠올랐고 처우도 많이 개선되었다. 현재 10여명의 기수가 팬클럽을 가지고 있고 경주가 열리는 날이면 ‘××기수 화이팅’ ‘오늘은 ×××의 날’ 등 다양한 플래카드가 나붙는다.
● 작년 하반기 여성 기수 등장
 ▲ 발주기를 박차고 나오는 기수와 경주마(위)금녀의 벽을 허물고 모래벌판에 새 바람을 일으킨두 여성 기수 이신영(오른쪽)과 이금주
기수 후보생 자격을 보면 ▲만 17~22세 ▲고교 졸업 이상 ▲신장 168cm 이하 ▲몸무게 50kg 이하가 필수 요건이다. 스포츠에서 체급별 경기를 제외하고는 작은 체구가 대우받는 이례적인 직업이다. 마사회에선 “왜소한 체격이 더욱 빛나는 곳”으로 선전하며 기수직 선택을 ‘유혹’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여성 기수가 등장해 경마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박진감과 살벌한 승부의 세계에 여성이 등장함으로써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이미지를 높여주는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녀들은 20기로 등단한 이신영(22세, 157.5cm, 48.5kg), 이금주(25세, 151cm, 45.5kg) 기수. 지난 75년에 6개월간 활약했던 이옥례씨 이후 26년 만에 ‘금녀의 벽’을 허문 ‘경마계의 아마조네스’다. 현재(8월 23일 기준)까지 성적은 이신영이 123전에 9승 2착 12회, 이금주는 123전에 2승 2착 6회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이신영의 기록은 남자를 포함한 동기생 중에서 상위에 올라 경마 관계자뿐만 아니라 동료 기수들까지도 놀랄 정도이다.
선배인 K기수에 의하면 “남자도 하기 힘든 직업인데 과연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많았는데 예상보다 너무 말을 잘타 놀랐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지금도 같이 경주로에 나서면 신경이 쓰인다”고 일부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현재 여성 기수는 앞의 2명 외에도 21기로 3명이 기수 자격을 얻어 ‘등단’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고, 2명(22기)은 기수양성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상금 344만원
현재 서울 경마장의 기수 숫자는 90명. 그 중에서도 박태종(37)은 ‘삼척동자도 알’ 만큼 유명하다. 87년 데뷔 이래 현재까지 전적은 6077전 892승 2착 821회. 박태종의 지난해 상금 수입만 2억3000여만원으로 매년 억대 이상의 고정 수입을 올리고 있다.
‘경마의 꽃’인 기수들은 경마 관중이 엄청나게 늘고 처우가 나아지면서 ‘스타’로 자리잡았다. 그 지위도 매년 향상되어 이젠 여느 연예인이나 다른 스포츠 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기수들도 한정된 경주(89일/1094경주:2002년 기준)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므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하다. 90명 중 30명 정도는 먹고 살 만하지만 나머지 60명은 항상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다. 인기있는 기수는 하루 7~8개 경주에 나서지만 성적이 부진한 기수는 한달에 한두번 경주에 나서기도 힘든 실정이다.
현재 기수들에겐 자신이 경주에서 이겨 벌어들인 상금 외에 월 100만원 정도의 생계비와 부상시 등 여러가지 명목으로 지급되는 복리후생비 130만원이 주어진다.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상금은 344만8000원. 그러나 이 돈은 상위 10명이 34%를 가져가 성적이 부진한 하위권 기수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기수들의 생활고는 곧 경마 부정으로 이어지고 생활이 넉넉해지면 나태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시행체인 마사회에서는 철저한 경쟁상금체제를 내세우고 있다. 특히 2005년 부산경마장 개장에 대비, 기수들의 숫자가 넘쳐나게 되자 기수협회서는 ‘기승 횟수의 감소에 따른 소득 감소를 보상해야 마땅하다’며 마사회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 생명을 담보한 직업
겨울엔 경주로에 모래가 얼지 않도록 소금을 뿌린다. 엄동설한에도 경주가 계속되므로 주로 관리에 만전을 기하지만 경주마나 기수에겐 고역이다. 얼어붙은 소금과 모래가 경주 중이나 훈련(조교) 중 말발굽에 튀어 보안경을 깨뜨리고 얼굴에 상처를 내며 이를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경주마들은 무조건 달리도록 ‘반사작용’처럼 길들여져 있어 주로에만 나서면 흥분한다. 경주 준비 중에도 기수를 내동댕이치고 도망가기 일쑤여서 기수들은 항상 발에 차이거나 낙마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데뷔 1년 정도가 지나면 거의 모든 기수가 병원 신세를 진다. 사소한 낙마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이 무리지어 넘어질 때나 말에 차일 땐 큰 부상을 입고 장기간 입원하고 대수술을 받게 마련이다. 박태종 기수의 경우 지난 93년 이후 20번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이에 따라 기수는 보험회사의 ‘기피 인물’로 부상을 당하면 산재보험 혜택이 없고 자신의 돈으로 비싼 보험료를 내야 한다.
기수는 마사회 직원이 아니다. 과거 단일마주제(마사회가 경주마 주인)에서는 기수도 월급쟁이였으나 개인마주제가 시행(93년)되면서 기수는 개인사업자가 되었고 조교사와 계약에 의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수들은 새벽 4시쯤이 되면 말 훈련을 시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또 한겨울에도 계속한다. 생명을 담보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데다 끊임없는 경마 부정 유혹, 그리고 대인 접촉의 어려움 등 생각보다 훨씬 폐쇄적인 공간에서 생활한다.
기수들은 50대가 되어도 기수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40대만 넘어서면 쉽지 않다. 기수들은 나이가 들면 조교사로 전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코스지만 현실은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 조교사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조교사는 한번 되면 정년 보장에 체중 조절과 같은 곤욕을 안치러도 되며 오직 상금만 많이 벌어들이면 된다. 따라서 기수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경마 전문가로 활동하거나 전업하는 사람도 늘었다.
● “말이 70%, 사람 30%”
경마에서 마칠인삼(馬七人三)은 흔히 통용되는 말(言)이다. 경주의 70%는 말에, 30%는 기수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말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경마는 말의 역할이 크다. 일정 수준에 있는 기수라면 좋은 말을 탄 기수가 유리하고, 아무리 유능한 기수라도 능력이 현저히 처지는 말에 기승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다만 능력이 엇비슷한 말이 많을 경우 일류 기수가 타면 말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것이 예상되므로 그만큼 기수의 능력이 승부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육안 식별이 불가능한 ‘코 차이’ 승부에서는 30%를 차지하는 기수의 능력이 승부의 매우 중요한 변수라는 것에 경마 전문가 누구나 공감한다. 기수 상대 조사에 의하면 말과 기수의 경주에서의 비중을 75% 대 25%, 또는 80% 대 20%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수들은 경마 주역(마사회, 마주, 조교사, 기수) 중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경마의 양적 성장에 따라 기수들의 대우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다. 성장의 혜택을 기수들에게 좀더 나눠줘야만 훌륭한 인적 자원들이 기수직을 선택할 것이고 그에 따른 경마 발전과 이미지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수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처우 개선과 함께 경쟁성을 강화해 경마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즉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줌으로써 기수들이 경주에 최선을 다하고 부정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나태하고 경쟁에 뒤진 기수들은 퇴출하거나 전직을 유도하는 등 제도적인 보완이 절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반석 조선일보 기자 bs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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