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5/02/28)  
 이창호, 신라면 먹다

  

TV나 언론보도를 통해 잘 알고는 있지만 한번도 그를 먼발치에서조차 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기사화된 그의 기호나 식성에 관해 알 리 없습니다. 신라면을 아니 라면이나 국수 등 면 종류를 좋아하는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창호가 신라면을 먹었다는 건 그가 제6회 신라면盃 세계 바둑 최강전의 한국팀 마지막 주자로 나서 일본과 중국 기사들을 물리치고 우승컵을 안았기 때문입니다.

이 대회는 국가대항전으로 한국 중국 일본에서 5명의 기사가 출전하여 넉다운제로 진행합니다. 예를들어 첫판에서 한국과 일본의 기사가 바둑을 두어 한국 기사가 졌다면 두번째 판은 이긴 일본기사가 중국기사와 붙습니다. 한번 진 기사는 [고향 앞으로]가고 이긴 기사는 아직 안 진 기사를 상대로 연전을 벌입니다.

결국, 누가 최후까지 남느냐로 우승을 가리고 그 남은 기사가 어느나라 기원 소속이냐에 따라 우승국이 결정되는 방식이죠.

자기가 가진 7장의 카드를 가장 먼저 버리는 사람이 이기는 [훌라]게임의 정반대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작년까지 다섯번의 대회에서 한국은 한 번도 우승 트로피를 넘겨주지 않고 [아도]를 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번은 물론이고 [언제나] 우리나라가 우승하는 게 당연한 걸로 알았습니다. 다른 세계바둑대회 결승에서도 우리 선수가 지는 경우는 너무 희귀해서 당연히 그럴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러했는데, 한국의 1~4번 타자가 모두 탈락을 했습니다. 딱 한 명만 남은 거죠. 바로 이창홉니다. 그 때 일본은 두 명, 중국은 세 명이 건재했습니다. 우리가 우승하려면 남은 다섯명을 몽조리 이겨야만 했던 거죠.

조건이 있었죠. 중간이든 막판이든 한 번이라도 지면 우승은 물 건너갑니다. 5연짱을 하지 못하면 중국이나 일본이 우승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네 번의 대국은 지난 23일 중국에서 열렸는데, 중간에 휴식일없이 4일 연짱으로 하다보니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했던 겁니다.

여기서 체크해야할 대목이, 23일 이전의 이창호에 대해섭니다. 새해들어 이창호는 중요한 대국에서 1승5패를 기록합니다. 특히, 상금 규모가 아닌 프로기사들의 선호도를 기준으로 국내 최고의 타이틀인 국수전 도전기에서 [독사]최철한에게 참패를 당합니다. 금강산에서 열린 마지막 대국에서도 힘 한 번 못써보고 돌을 던졌습니다. 치욕의 3:0 영패였죠.

1월의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에선 그동안 12번 싸워 11번 이긴 위빈9단에게 마지막 어이없는 실수를 해서 졌습니다. 바둑계에서는 이창호가 [슬럼프]인지 드디어 [내리막]인지를 검토하고 나섰습니다.

거기에 참여한 관계자들은, 우려 반 호기심 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잘 안다는 [사부]조훈현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지만 일단 지켜보자"고 말했습니다. 조훈현과 함께 [조서시대]를 열었고 어린 이창호가 혜성처럼 나타나자 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예언했던 [토종]서봉수는 "권태기일지도 모른다"며 [내리막]이라는 추측을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혈혈단신 중국으로 떠나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봤습니다.
최연소 세계대회 타이틀 홀더, [신산神算] [외계인] [삼중허리] [돌부처] [강태공] [전대 고수의 환생] 한국 바둑을 구하러 온 [터미네이터] 등등, 수많은 함축이미지를 보유한 당대 최고의 초절정 울트라 고수였지만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갖다 붙이는 호사가들의 우려를 단순한 입방정이라고 몰아 부치기에는 그가 보여준 최근의 능력이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참 오래전에, 귀부분의 사활을 검토하던 바둑TV 해설 프로에서 어떤 프로기사가
"화점에 돌을 놓고 날일자로 한 점을 벌린 모양은 집으로 따져 몇집이나 될까요?"라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둑을 [둔다]는 프로들도 제각각 대답이 다를 미완성의 모양에 대한 궁금증이었죠. 그런데 해설하던 프로기사는 단호하게 여덟집이라고 선언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유를 설명했습니다. 수학적으로 공식이 있어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의 상황 변화에 따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언젠가 이창호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창호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한참을 뜸들이며
"여덟집 정도 되지 않나요"했다는 것이죠.
그 얘기를 전하면서 그 프로기사는
"이창호가 여덟집이래면 8집인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골동네에서 제일 못두는 5급에게도 뻥뻥 나가 자빠지는 [물5급]인 제가 고수들의 선문답을 이해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왜 8집인지를 알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바둑계로 진출해서 저의 숨겨진 적성을 발휘하는 게 제 인생의 의무일 겁니다. 다만, 이창호의 [8집] 견해를 무시하지 못하는 혹은 안 하는 다른 프로 고수들로 인해 이창호에 대한 절대적인 그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실이 세계바둑 최강국의 국민으로서 자랑스럽다는 거죠.

한국에서는 동네북처럼 얻어 맞고 한물갔다는 대접을 받는 이창호가 중국과 일본의 대표 선수 다섯명을 물리치고 신라면 트로피를 가져갔으니 그 사람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이창호만 넘으면 세계 정상을 넘볼 수 있다고 바둑판 머리에 새겨 놓았던 그들은 한국에서 이창호를 이기는 최철한이나 이세돌이나 오늘도 한국기원에서 프로가 되기위해 공부하는 연구생들의 이름을 더 큰 글씨로 새겨 놓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올대가리로 팔린 우승 후보마를 타고 나와 그에 버금가는 강한 상대를 다섯게임 연속으로 셧아웃시킨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면 이창호는 뭔소리냐고 갸우뚱하겠지만 경마로 상상하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이창호는 해냈다는 칭찬입니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다섯게임을 [찍소리]못하게 모두 불계(不計)로 제압했습니다.
[기리까시 가락 쿠션]으로 솜씨를 뽐내더니
[완가락][투가락][구멍가락]으로 [가라꾸]의 진수를 선보이다
마지막 마무리 [완전가락]으로 끝을 냈습니다.
귀신에게 홀린듯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상대들이
장갑을 벗고 손을 씻는 절차를 잊고있자
기다리던 이창호 나즈막하게 한마디합니다.
"아줌마,,,났어요"

바둑강국의 전통과 명예를 살린 이창호. 주위의 우려를 한방에 날려버린 그의 저력이 드라마처럼 보기 좋습니다. 그가 자랑스럽고 그를 뒷받칠 후배들이 탄탄한 우리 바둑의 미래가 뿌듯합니다.

한국 바둑이 그의 자랑이듯이 그는 우리 바둑의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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