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7/08/24)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정확하진 않지만 그가 데뷔할 무렵이니 거의 20년 전쯤 되나 보다. 그날은 외부 강사의 강연이 대강당에서 열렸다. 기수 조교사 관리사 모두가 마사회 직원 신분이다 보니 행사에는 말 그대로 모든 경마인이 다 모였다. 강연 내용은 '반공', 5공 시절이고 마사회장이 군장성 출신이니 하나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주입식 교육의 폐단은 수강생들의 집중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점.  

재미없는 강연 내용 때문에 딴청을 부리는 수강생이 늘어만 갔다. 대강당 2층 앞자리에 앉아있던 모 조교사도 심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릴없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최대한 자세를 낮춰 낮잠을 즐기는 자세 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는 수강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더 놀란 건 정자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리가 위에서 내려다보면 움푹 파여 보였던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모 조교사는 옆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묻더니 뭐라고 적고는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그에게 날렸다. 비행기는 나비처럼 날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목표지점을 훨씬 넘어 반공을 얘기하던 강사에게까지 날아가 버렸다. 여기저기서 걱정의 탄성이 들렸다. 잠시 후, 강사는 종이비행기를 펴보더니 이렇게 읽어 내려갔다.
"임대규, 하느님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공식 기록에는 143cm라 했지만 실제로 보면 그보다 작지 싶다. 그럼에도, 5,357전 동안 632승을 거둬 현역 다승 5위에 올랐다. 역경과 단점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로 얻은 '작은 거인' 칭호는 그가 죽은 지 하루 만에 추서된 영예기수만큼이나 그에게 딱 어울리는 칭찬이다. '작은 거인' 이란 애칭이 그를 설명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동료보다 더 핸디캡을 극복해야만 했던 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흡사 마상 무예를 보는 느낌이지만 말몰이에는 파워가 넘쳤다. 그래야만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보다 10배에 가까운 무게의 경주마를 '잘' 달리게 하기 위한 특별한 비법이 필요했던 까닭은 그가 동료보다 훨씬 왜소했기 때문이다.

'극복해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 같은 마방 소속이었던 최영주 조교사는 "한번 목표를 정하면 한눈팔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저 작은 체구 어디에 탱크 같은 힘이 숨어 있는지 항상 궁금해 했다"고 고백했다. 암 투병 중이던 후배에게 500승 달성 상금 500만원을 통째로 쾌척했다. 믿지 못하던 동료를 설득해서 프리기수제를 도입하고 기수의 스타화를 위해 모델 제의를 받아들였다. 설마 했지만 경주로의 안전을 이유로 경마를 중단시키는 뚝심도 발휘했다. 그해 겨울의 투쟁 기록은 안전 보장을 쟁취하기 위한 또 다른 극복의 과정이었다. 극복은 죽기까지 그를 지배했던 화두였다. 임대규의 힘은 극복의 트라우마가 분명함에도 안전보장은 그가 극복하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됐다.

마사회 영토에서 그것도 경마 시행 중에 일어난 사망사고의 귀책사유는 마사회에 있었으니까 협상이 필요했다. 실리와 명분 그리고 여론이 저울질 받았다. 노심초사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선장을 잃은 기수협회는 고인이 이번 협상을 이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되짚으며 유지를 받들고자 했다. 결국, 5천만원이 넘을 장례비용을 마사회가 부담하고 최소 10년 이상의 매점 운영권과 준마아파트 거주권에 특별 위로금 1억원을 얹기로 했다. 실리로만 따진다면 마사회가 이미 들어준 5억원의 보험금과 또 다른 보험금 등을 합쳐 10억원을 넘어섰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안전대책 마련에 골몰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앰브란스 차량을 최신형으로 교체하고 응급구조 요원을 확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목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대규가 앰블런스에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응급구조사가 자격증이 없는 주말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충격적인 폭로가 뒤따랐다. 병원으로 후송 중에 환자의 기도확보를 전혀 하지 못해 숨질 수밖에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증언도 이어졌다. 응급시설과 인력을 보강한다는 건 그동안의 부족을 자인하는 거다. 아무 문제없는데 돈 들여 생색낼 일은 없잖은가.

3년 전 유훈기수가 새벽 경주로에서 사망했을 때, 늦게 도착한 앰블런스는 마사회 총무팀 소속이고 구조사는 경마팀 소속이라서 지휘체계는 물론이고 사고발생 시 대처에 문제가 있으니 개선하자 했다. 더구나 구조사 신분이 임시직이라서 고용안정에 문제가 있으니 정규직으로 전환해서 의료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권고했다. 그러나 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이 최근의 일이다. 마사회는 거의 3년을 끌어오다 겨우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그마저도 알고 보니 월 130여만원의 박봉에 만족해야 하는 마사회 최저 임금 근무자란다. 오히려 구조 받아야 할 구조사라는 소식이다.

정확한 이유가 불명하지만 그렇게 인색하다 보니 그나마 있는 구조사는 사고 발생 빈도가 가장 높은 새벽 조교장에 투입되고 경주 때에는 무자격 알바생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기수들은 그들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었다.

마사회는 무엇 하고 있는가. 마사 지역 출입 예상가들의 유료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했는데도 근 4년 동안을 검토 중이라고 얼버무리다가 피소될 위기에 처해있고,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예상지 업체 길들인다고 출마표와 동시에 공개돼 온 텍스트 파일 자료를 틀어막아 선의의 경마팬들을 분통 터지게 해서 결국은 피소당했다. 농림부 고위간부가 경마장에 오다가 본 길거리 예상지 판매 목격담에 오버해서 그걸 근절시킨답시고 짜낸 묘안이 경마팬의 불편을 초래하고 경마정보의 공개를 봉쇄당한 셈인데도 뭐가 잘못인지 조차를 모르고 있다. 모르다 보니 경마일 마다 제작하는 '경주 프로그램' 책자를 간행물 등록조차 안 하고 있다가 이번에 지적을 받고는 은근슬쩍 합법화시켰다.

그뿐인가 매주 목요일에 받는 출마투표가 공휴일인 석가탄신일과 겹치자 하루 앞당겼다.  마필 컨디션이라는 게 하루가 달라서 세심히 출주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24시간을 앞당겨 버리니 황당했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았던 시한을 공휴일 챙기자고 바꿔서 수많은 마필관계자의 원성을 들었다. 샐러리맨일 뿐인 마사회 직원들이 경마 시행에 말(馬)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을 엉뚱하게 도입한 까닭이었다.

이번엔 콘테스트를 기획했는데 가관이다. 경마 예상지 품질평가 한답시고 팬들에게 앙케이트를 하는데 한마디로 어떤 예상지가 가장 좋으냐는 물음이다. 경마팬은 가장 눈에 익은 예상지만을 고른다는 그래서 좀체 다른 걸로 바꾸지 않는다는 기본 습성을 이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거다. 앞으로도 계속될 이벤트는 결국 "당신이 보는 예상지는 뭡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예상지끼리의 건전하고 발전적인 경쟁을 도모하거나 그럼으로써 팬들에게 예상지 선택의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메이저 예상지의 확고부동한 상위 랭킹을 시행체가 나서서 재확인시켜 주겠다는 건데, 그에 따른 책임도 지겠다는 걸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 부서에서 관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응급구조사 문제였다. 박진감 넘치는 경주 편성을 위해 핸디캡으로 고민하고 별정 중량으로 재단해서 오는 손님에게 스피드를 자랑했지만 정작 실전으로 치러지는 생과 사의 게임에는 정식 응급구조사를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재(人災)다. 막을 수 있는 사망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거다. 남들은 다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마사회만 안 그래도 된다고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버틴 거 둘 중의 하나다. 물론 그것도 모두 인재다.

그러니 당초 5일장이 6일장 된 것도 유가족이 무리한 요구해서 협상이 지연된 게 아니다. 마사회장이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았고 과천경찰서는 사고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구조사가 배치되지 않은 마사회 업무의 행정 난맥을 벌해야 했다. 외양간 고친다고 잃은 소를 되찾는 거 아니다. 이제 와서  억대 앰블란스 도입하고 정식 구조사를 충원 배치한다고 호들갑 떨면 유가족 눈에는 피눈물 난다.

우리의 경마 시행 시스템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허점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내에서 산재율 1위라는 불명예를 언제까지 명예로 떠받들고 갈 것인지 궁금하다. 안전시설을 확보해서 사고를 줄이고 결국은 경마시행의 질적 향상과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는 대책은 왜 실현되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아직도 나의 귓가에는 휴일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하던 여자 아나운서의 경마장...기수...사망...임대규라는 소리가 자꾸만 왱왱거린다. 모랫바람이 부는 경주로 위로 투타타타타타 소리를 내며 헬기가 지나가고 커다란 탱크들이 미친 듯 달리는데 자세히 보면 바람을 헤치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건 미친 말들이다.

그는 갔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멀어져간다. 8월의 상처는 기억하기조차 버거워지겠지만 그가 생전에 온몸으로 강조한 항쟁정신은 끊임없이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그것만이 죽은 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책임이다. 의무다.

안전사고 예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마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 제 아무리 귀하다 해도 인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음을 반드시 명심하자. 그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의 정신까지 떠나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젠, 하느님이 가장 가까이하게 됐지만 경마장에선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을 추모하고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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