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올 한해, 가장 감동적이었고 행복했던 사건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지난여름의 함성을 첫 손에 들겠다. 월드컵 첫 승이라는 역사를 만든 날이 그렇고 우리의 소원처럼 염원하던 16강의 진출을 확정지은 날도 그러하며 8강은 물론 4강까지 오른 날들은 더 말해 무엇하랴. 2002년 6월은 기적과 환희의 한 달로 기억될 것이다.
광복이래 최대의 민족 축제로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연인원 2,193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광장으로 모였다. 한반도 전체가 붉게 단풍든 꽃밭이었다. 태극기의 물결이 휘날리고 히딩크, 홍명보의 커다란 사진들, 대각선으로 뻗어 오르는 팔들, 오~필승 코리아, 짝짝짝 짝짝. 그 빨간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왠지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 때문에 교과서 속에서만 웅얼거리던 이름. 감히 부르는 것은 불충(不忠)인 듯, 입 밖으로 내뱉기에 적당한 용도를 찾지 못했던 그 이름을 온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안착시킨 것이 월드컵이었고 그 국민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따듯한 품에 안은 것이 대한민국이었다.
요즘도 분기충천(憤氣衝天)한 젊은이들이 모인 자리에서나 노년들의 술자리에서도 가끔씩 들을 수 있는 대~한민국. 알고 지내던 해외동포 한 분이 옆자리의 외국인이 두 팔을 앞으로 쭉 펼치는 동작을 하며 대~한민국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왔을 때 당황하며 난감했던 기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평소 뜻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를 가까스로 직역해서‘The Great Republic of Korea’라고 번역해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 엄지손을 치켜세웠는데. 잠시 후 이 동포는 영어문장을 속으로 읊조리다 다시 우리말로 풀이해보니 '위대한 한국'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외친 응원구호가 '위대한 한국'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근사한 구호였던가. 적당한 운율에 맞춰 절제된 동작으로 우리는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외쳤으니. 그리고 위대한 승리를 얻었으니.
그 외침을 경마장에서도 들었다. 지난 5월29일 안양에 사는 한 경마팬은 마사회홈페이지에 기존의 대형 전광판을 이용한 월드컵 실황중계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마사회는 서울방송측과 공동 기획하는 형식으로 경마장을 개방하여 응원전을 펼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첫 경기가 열린 날은 인근 지역주민을 위주로 1만5,000여 명이 모여들더니 두 번 째 미국과의 경기에는 비가 오는데도 3만3,000여 명이 입장했고 갈수록 열기를 더해 국민적 축제로까지 승화된 마지막 경기는 15만 명을 돌파했다. 모두 6번을 중계하는 동안 모인 인원이 42만 여명에 달했다. 경기 북부지역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올라온 축구팬들도 눈에 띄었다. 4강 진출을 다투는 스페인과의 경기 때는 경마 시행일이어서 경마를 중단하고 응원전을 펼쳤지만 항의하는 경마팬은 없었다. 오히려 입장하는 빨간색의 응원객들에게 경마팬 전용도로 한쪽을 비켜주는 넉넉함까지 보여주었다.
경마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이 지역사회와 사회 공익에 이바지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마사회는 물론이고 모든 경마관계자와 경마팬들이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관변단체와 유명무실한 비영리 법인에 특혜처럼 제공된다는 비난을 받아왔던 마사회 수익금의 사회 공익기부금제도는 무릎 꿇고 반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중계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공공(公共)의 이익에 기여한 가시적 성과는 미미하고 부진하며 거꾸로 공공은 기부금제도의 효율을 높이고 투명성을 확보하라고 꾸짖으니 말이다.
꿈만 같았던 지난여름의 월드컵이 남긴 찬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경마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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