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04/24)  
 新 강급제



뚝섬에서 과천으로 경마장이 이전한 89년 겨울에 데뷔한 그녀의 이름은 '전람회'였다. 400KG에 불과하고 체격도 왜소했지만 선행 능력만큼은 뛰어났다. 그때도 불량 주로는 선행마에게 유리해서 정확히 40전을 치르며 얻은 4승 중에 3승이 공교롭게도 비 온 날의 일이었다. 세 번 우승할 때의 경주 거리가 1000m와 1200m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도주형 단거리 말이었다.

6등급에서 시작했다. 1승을 올리거나 최근 1년간 수득 상금이 등급별 최하위 거리의 1착 상금을 넘으면 한 등급 승군을 하는 당시 제도에 따라 5등급이 됐다. 1200m에 출전해 다섯 번을 뛰는 동안 연속해서 5착 이하를 세 번 기록하니 다시 6등급으로 강급되었다. 6등급 1000m에 내려가자마자 다시 일등을 했다. 다시, 5등급. 그리곤 두 번 더 우승해서 결국 3등급까지 올랐다. 그러나 등급에 맞게 늘어난 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꼴찌를 밥 먹듯이 했고 우승마와의 착차가 50 마신 이상 벌어질 때도 있었다.

결국, 다시 5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람회'가 1000m 경주에 출전하게 되었다. 이미 강급 전과가 있고 그때, 보란 듯이 우승한 그녀가 적정거리를 만나 제 기량을 펼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 경주에 내가 단승식 마권을 샀기 때문이다.

정식 명칭은 '강급제'(降級制)였다. 홍대유 기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기수들은 허구한 날 말을 당기다가 재결에 걸려 중징계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라고 고백한다. 우승해서 상위 등급으로 올라갔지만 상대가 강해서 경쟁력이 없다 싶으면 속된 말로 바닥을 몇 번 쳐서 다시 하위 등급으로 내려오는 제도였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지라도 조교사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땅 짚고 헤엄치기가 가능한 하위군으로 내려올 수 있는 이 제도는 인위적인 능력 은폐와 승부조작의 소지를 용인하고 있었다. 등급 조절을 잘하는 것이 조교사, 기수의 유능을 판독하는 바로미터였다. 즉, '세 번은 짧게 한번은 길게' 말을 타도된다고 마사회가 제도적으로 허용해줬다.

93년부터 이 제도는 없어졌다. 조교사 12명과 기수 16명이 서울지검 특수2부에 연행된 92년 경마부정사건의 여파로 마사회는 '건전경마정착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대책의 주요 골자는 금요 경마폐지, 민간 장외지점 폐쇄, 묶음번호 폐지 등과 함께 강급제의 폐지였다. 공정 경마 구현을 위한 대책 가운데 하나였다.

공식적인 존재의 이유는 원활한 경주마의 운용 때문이었다. 실제로 강급제가 폐지된 92년까지 이전 3년간 경주마 한 마리당 평균 사용기간이 45.6개월이었지만 93년에는 29.3개월로 급격히 떨어졌으며 94년에는 전체 마필의 숫자가 전년대비 88.7%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 12년 만에 새로운 강급제가 부활했다. '1군 가나급 분리시행제도'가 그것이다. 올 4월부터 1군 마필을 대상으로 '가'급과 '나'급으로 나눠 경주를 시행한다. 금주 기준으로 국산마 62 두, 외산마 50 두의 전체 1군마들은 최근 1년간의 조건수득상금을 기준으로 두 개의 군으로 나눠진 경주에 출주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조건상금이 '가'급에 미달하는 국산 1군 하위마들은 '새강자'나 '쾌도난마'를 피해 약한 상대들과 맞붙을 기회를 제공받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비슷한 능력의 말들끼리 붙여 놓아서 박진감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내부적으로는 경주 편성을 원활하게 해보자는 취지다. 더 까놓고 얘기하면 경주마 운용을 탄력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1군마들은 그동안 극심한 능력편차 때문에 경주편성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현상 때문에 팬들의 호응도가 가장 높은 1군 경주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주말이 심심찮게 나왔다. 워낙 강한 상대들이 버티고 있는 최고의 무대는 능력 열세마들에게 무덤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산 2군마의 경주에서는 고의적으로 승군을 꺼리는 경향도 나타났으며 팬들의 입장에서는 우승마 선정이 그만큼 까다로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만 유독 채택하고 있는 군별, 등급별 제도의 원초적인 문제였다. 경주마 자원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불용률을 낮추고 시행체의 통제와 관리 감독을 수월하게 하려는 일종의 편법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겉이 있고 안이 있듯이 호의가 있다면 반대로 악의가 있는 법이다. '1군 분리 시행제도'를 예전의 '강급제'와 비교를 하면 지나친 억지라 할지 모르겠지만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다시 말해, 악용하려는 세력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나'급 경주가 2군 동일거리의 우승 상금보다 낮은 상황에서 1군 승급은 여전히 탐탁지 않을 수 있고 고의적으로 '나'급만을 선호하려는 마방 운영의 묘를 전혀 배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가 '가'급 경주마의 관계자들이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우승열패의 원칙에 대한 훼손이라는 지적에도 논리적인 설득이 필요하다.

12년 전 부정경마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지목받았던 '강급제'의 폐단을 교훈 삼아 새로 시행되는 '新강급제'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인위적인 능력 은폐와 승부 조작 의도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제도 시행의 의지가 아무리 순수하고 시의적절했다 해도 반드시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마장의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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