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12/18)  
 대한민국 경마대상

올해 팔순을 맞은 원로배우 황정순. 그가 오랜만에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다섯 나이에 극단생활을 시작하며 출연한 '마부''갯마을''팔도강산''김약국집 딸들'과 같은 드라마나 영화는 더 이상 아니었지만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돼 시상식 무대에 오른 것이다.

발표자로 나온 68세의 신성일이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소개한 원로배우는 이제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객석을 가득 메운 영화인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로 맞았다. 세계 영화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미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공로상 수상자가 무대로 나올 때 익숙하게 보아왔던 장면이었다.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정다감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후배들에게 '어머니'라는 닉네임을 선물 받은 것이 감격스러웠는지 약간은 떨리는 소리로 지난날의 소회를 천천히 이어갔다. 어린 시절 서울로 온 수학여행 때 본 영화 한 편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온 그녀는 자신이 시상식장에 서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객석의 후배들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날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올드보이' 최민식은 배우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며 목이 멨고, 여우주연상의 전도연은 배우로서의 갈 길이 끝없이 멀다는 가르침을 주신 대선배를 존경한다며 울먹였다. 당시 상황을 전한 신문은'대배우 황정순이 스타를 울렸다'고 썼다.

아마도 이번 영화제의 백미는 공로상 수상 장면에 있었지 싶다. 여전히 인자한 한국의 어머니상을 보여주던 대배우와 그 황혼을 가슴 뭉클하게 바라보던 후배들의 교차하는 표정을 TV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은 영화계의 돈독한 선후배 교감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런 감흥도 잠깐, 눈을 경마장으로 돌려보면 모든 경마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상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연도대표마의 건승을 축하하는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프로야구는 이맘때, 황금장갑 시상식을 하고 스포츠 신문에 대서 특필되는데 입장인원이 더 많은 경마장에는 왜 황금채찍상이 없는 것일까. 팬들을 웃기고 울렸던 감동의 질주를 선정하여 시즌을 정리하고 후년의 더 멋진 드라마를 기대하지 않을까. 은퇴한 선배에게 약소하나마 공로상을 선사하는 자리를 만들어 덕분에 지금의 자기들이 있다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앞날의 지혜를 얻으려 하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 경마장에 들어와 일생을 말과 함께한 경마인이 공로상을 받는 자리에서 "말이 내 인생의 전부였으며 그것을 천직으로 알았다"고 추억하고 "그렇게 살아온 한평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일어서 박수로 맞이한 객석의 후배들이 그를 보며  자신들이 선택한 현재의 길을 자랑스러워하며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겠다고 다짐한다면 이보다 더 뜻깊은 자리가 어디 있을까.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팬들은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겠는가.

정년 퇴임하는 선배보다 초라하게 없어진 현역들이 더 많았으니,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나마 현존하는 원로들을 애써 무시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경마장의 연말은 항상 초라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는 80년이 넘었어도 그를 수반하는 문화가 일천한 때문이라는 핑계는 이제 그만. 이제라도 새롭게 가꾸어 나가자. 황정순같은 선배를 보고 싶다는 바램을 충족시킬 명예와 그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폭넓은 신뢰를 소중하게 쌓아가자.

남부럽지 않은 '대한민국 경마대상' 시상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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