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01/10)  
 2004는 희망이어라


새해가 밝았다. 첫날은 흐리고 이튿날 아침엔 안개가 자욱했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이 2004년 갑신년이 밝았다.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리면 우리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 내고, 촛불을 켜고 광화문에 모여 민족자주를 외치고,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팬클럽의 열기가 새로운 대통령 탄생의 주역이 된 것을 진보의 승리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어쨌든 한해를 기대했다. 새해에는 그렇게 새로운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은 기대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사회 안전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어버이처럼 종업원을 보살펴 주던 평생 직장도 사라 진지 오래였다. 이미 진행 중이었던 비정규직과 아웃소싱의 보편화로 개인의 삶은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었으며 농촌은 FTA 비준과 맞물려 점점 열악해지고 있었다. 이에 항거하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과 한농연 회장이 자살했다.

한겨레신문의 구본권은 “신용불량자가 350만 명을 넘어서는 현실에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386(직장인들이 실제 체감하는 정년), 사오정, 오륙도 라는 말들이 청년실업과 조기퇴출 시대를 대변했다”고 말했고, 보수언론들은 “사사건건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고 ‘대통령도 못해 먹겠다’고 한다는 이가 대통령직에 앉아 있다는 게 국가의 수치”라며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도덕적 신용불량자’로 규정했으며, 거대야당은 ‘잊어버리고만 싶은 한 해’라고 비아냥거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피부로 느끼는 경제체감지수는 IMF 국난을 능가했다. 일자리 창출의 주역인 제조업은 계속 추락했고 중소 공장은 이미 38%가 중국으로 옮겨갔다. 지식기반 서비스산업이 빈자리를 메우기는커녕 먹고 즐기는 서비스업마저 불황의 늪에 빠졌다. 경제가 2%대 성장에 그친 지난해 병원 환자는 40%, 음식점은 30%, 택시 손님은 40%, 서울경마장 매출은 30%가 줄었다.

그뿐인가. 카드 빚에 몰려 자식을 아파트에서 던지더니, 이제는 경마와 도박에 쫓겨 두 자식을 차디찬 겨울 한강 물속으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포위하고 있던 재앙의 카테고리는 어디가 끝인지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경마가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 가정의 오목한 구조를 와해시키는 인플루엔자라는 사회적 통념을 되새기며 선배들의 지론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기꺼이.

경마장은 과천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사회적 비정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바깥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덤덤했다. 비정의 아버지는 나와 같은 경마팬이었지만 정신병자일 거라고 차별했고 마사회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예전의 고객쯤으로 치부했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갈 무렵, 느닷없이 경마장의 말 주인인 마주들은 경마를 중단하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경마의 기본원리인 우승열패를 도외시하는 1등의 상금비율을 내리고 출주 수당을 전면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강남 사거리에 마사회가 임대해준 마주 회관을 독립 건물로 신축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능력검사제도를 없애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판알을 튕기고 시행체의 고유 권한인 경주 편성권을 내놓으라고 국회상임위원회에 마사회법 개정청원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마중단에 동의한다는 위임장에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경마팬을 인질로 삼아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면 된다는 발상을 바라보는 마사회의 멀뚱거림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상 최초의 내부승진이라는 어색한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신임 마사회장의 행정주의는 유능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다양한 이익 집단들의 상반된 주장과 권리를 조율하는 데는 유력하지 못했다. 곪아터진 동물병원의 비리를 흐지부지 시키려는 파벌들의 또 다른 음모를 파악하기에도 버거워했고, 마주협회의 경마 시행권을 내놓으라는 무리한 요구에 대응하는 마사회 실무진의 논리를 대표로 나서서 해설하지 못했다. 관련단체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풀어 가는 리더십 역시, 특출하게 보여준 것이 없었다.

경마는 이번 주부터 시작하지만 2004 경마시행계획은 늦게 확정되어 2월부터나 제대로 적용된다는 소식이다. 남들은 벌써 새해를 시작했는데 경마장은 아직도 2003년을 한 달 더 보내야 한다. 음력(陰曆)을 사용하는 마사회에 우리 경마의 비전을 제시해달라는 요구는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낡은 캘린더는 뜯어내자. 우왕좌왕은 지난 한 해로 충분하다. 한밤중에 북극성을 향해 노를 젓는 뱃사공은 그 방향이 옳다는 신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런 신념을 제시하자. 낡은 것은 보내고 새것을 맞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정도로는 부족하다.

정확히 120년 전의 갑신정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개혁이었음을 상기하자. 낡은 경마구조를 청산하고 투명한 패러다임을 세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경마를 사랑하는 방식이며 새해부터 머리맡에 붙여두고 지향해야 할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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