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3/05/03)  
 영예 기수와 신상필벌(信賞必罰)



20년이 지난 뚝섬 시절의 이야기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지금은 고참기수인 그가 초년 시절에 겪었던 일이다. 어느 날 조교사가 그를 불렀다. 미국산 신마를 가리키며 열심히 조교 해서 잘 타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시에도 신인 급에 속하는 기수들이 말을 얻어 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갈고 닦았다. 새벽 주로를 달리며 '삼학도'에게 순발력과 지구력을 불어넣었다. 마구간에서 밥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온갖 정성을 다해 말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교사에게 경주에 나가게 해달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드디어 첫 경주, 그러나 꼴찌를 했다. 자신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분해서 그랬는지 잠도 오지 않았고 밥도 못 먹었다. 두 번을 더 나갔지만 계속해서 꼴찌를 했다. 승리만이 경마의 최고 가치라고 믿었던 그에게 꼴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놀이운동을 마치고 마방으로 돌아오던 '삼학도'와 그는 버드나무 아래서 막걸리 파티를 하던 관리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삼학도'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바닥에 있던 막걸리를 반 사발쯤 마셔버린 것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이 부리부리해지며 온몸의 근육이 탱탱해지는 것이 아닌가. 주로로 내려갔다. 한바퀴를 돌았다. 힘이 넘쳐흐르는 녀석은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을 천리마로 변해 버렸다. 소심한 성격이 대범해진 것이다. 출전 신청을 했다. 조교사와 마방 식구들은 시답지 않은 표정들이었지만 이번만은 우승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경주시각 한 시간 전에 마방을 찾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따라주며 말했다. 너와 함께 우승하고 싶다고. '삼학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예시장을 거쳐 발주기 앞으로 가는 동안 행복한 상상을 했다. 멋지게 우승을 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다음, 대상경주에도 나가 트로피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리고 기자들이 소감을 물으면 '삼학도'의 목덜미를 두어 번 토닥거려 주겠다고.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발주기를 들어서려는 순간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적기가 나타났으니 국민 여러분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민방위 본부의 지시를 따르라는 청천 벽력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중국 민항기가 넘어온 것이다. 경주는 한 시간쯤 지나서 속개됐지만 이미 막걸리의 약효가 지난 '삼학도'는 흐느적거리며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정정당당하지 않게 술기운을 빌린 우승 미수사건을 비호할 생각은 없지만 멋도 모르던 수습시절에 우승하고 싶어했던 승리 근성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가 20여 년이 흘러 기수로서는 장신의 핸디캡을 무릅쓰고 '새강자'를 최고의 국산마로 만들며 영예 기수 후보에 오른 것도 축하할 일이다.

기승 경력 10년 이상이고 경주에 3천 번 이상 출주해서 5백 승 이상의 성적을 거둔 기수를 대상으로 하는 영예 기수 심사가 현재 진행중이다. 잘못을 가리고 벌(罰)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상(賞)이라는 동기부여를 통해 기승 기술을 연마케 하고 나아가 한 차원 높은 양질의 경마를 경마팬에게 제공하려는 취지의 이 제도가 제정된지도 11년이 지났고 이미 6명의‘황금채찍'이 탄생했다.

다만, 현역 기수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동료간의 위화감과 반목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일본의 '오카베 유키오'나 미국의 슈메이커(William Shomaker)도 현역 시절에 영예 기수라 부르지 않았다. 영국의 피곳(Lester Piggott)기수가 은퇴 후 왕실로부터 백작(伯爵)의 칭호를 받았을 뿐이다.

또 한가지, 대종상은 물론이고 프로 스포츠의 MVP 역시 시행 주체가 아닌 기자단과 팬들의 투표로 선정한다. 하지만 영예 기수 선정은 마사회가 도맡아 한다. 심사에 경마팬의 의견이 반영된다지만 고작 5점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기수들은 마사회가 면허권으로 자신들의 목줄을 죄고 영예 기수라는 당근으로 희롱한다고 여긴다. 우리 경마가 많은 부분을 답습하는 일본에도 없는 제도를 운용하면서 기수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벌이 아닌 상을 주고자함이라면 당사자인 기수협회가 주관하고 경마팬들의 의견을 상당 부분 반영시켜 경마의 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이벤트는 어떨까.





48  신임 마사회장에게 바란다 ③ - 王처럼 모신 댔지?     장청수 2003/08/30
47  누구를 위한 야간경마인가     장청수 2003/08/23
46  박창정 유감(遺憾)     장청수 2003/08/16
45  신임 마사회장에게 바란다 ② - 도덕적으로 떳떳 하라     장청수 2003/08/09
44  마사회 '경주 프로그램' 들여다 보기     장청수 2003/07/26
43  신임 마사회장에게 바란다 ① - 경마를 산업으로 이해하라     장청수 2003/07/19
42  신임 마사회장의 조건 ②     장청수 2003/07/12
41  신임 마사회장의 조건 ①     장청수 2003/07/05
40  야마토 사쿠라 (大和さくら)     장청수 2003/06/28
39  마사회장과 탁구협회장     장청수 2003/06/21
38  과천시장 보시오!     장청수 2003/06/14
37  김명근의 눈물을 보는 몇 가지 방법     장청수 2003/06/07
36  공정과 신뢰는 별개다     장청수 2003/05/31
35  [기획연재]馬主를 말한다 ② - 개인 마주제의 탄생 배경     장청수 2003/05/24
34  본질은 기수협회의 내분이다     장청수 2003/05/17
33  [기획연재]馬主를 말한다 ① - 개인 마주제의 탄생 배경     장청수 2003/05/10
 영예 기수와 신상필벌(信賞必罰)     장청수 2003/05/03
31  마주협회의 횡포     장청수 2003/04/19
30  신분증을 까라고?     장청수 2003/04/12
29  또 다시 예상지 가격인상인가     장청수 2003/04/05

[1][2][3][4] 5 [6][7]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