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08/14)  
 밸류 플레이(Value Play)


휴장 전 마지막 경주에서 단승식과 복승식에서 최하 배당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모았던 '밸류플레이'가 이름과 다르게 시종 하위권에 머물다 결국 8위에 그친 사안에 대해 재결은 공정관리팀에 승부 조작 등 부정경마와 연관성이 있는지를 조사하도록 했다.

심상치 않은 재결의 단호함과 때를 같이하여 팬들은 의혹을 해소하고 관련자 모두를 처벌함으로써 그동안 추측만 난무하던 고의적인 승부 회피 행위를 엄벌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모처럼 재결을 칭찬하며 공정경마의 최후보루라는 믿음을 확인시켜 달라고 격려했다.

기승 기수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동정론은 기수만의 독단적인 승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행을 막연하게 알고 있는 팬들까지도 가세시켜 조교사나 마주 등이 부당한 지시를 내렸을 거라는 심증을 피의사실로 기정 사실화시킨데서 출발했다. 재결이 조사결과를 토대로 재정위원회 개최까지 거론한 데는 그만한 물증이 있을 거라는 기대심리도 한몫했다. 모든 처벌에는 항상 기수만 희생양이 되었다는 관례에 익숙한 팬들은 경주 직후 기수 제재가 유보된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열흘에 걸친 보안처의 조사결과를 건네받은 재결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증만으로 멍석을 깔았지만 뚜렷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거니와 관련자들의 계좌까지 뒤졌지만 이렇다할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무렵 경마 언론들은 문서화되지 않은 보도자료를 토대로 같은 논조를 펼쳤다. 정기용 기수, 박대흥 조교사, 경주마 밸류플레이에게 각각 면허정지, 조교정지, 출주정지의 중징계를 내릴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운을 띄웠다. 심지어 기수, 조교사의 면허가 박탈될지도 모른다는 미확인 보도까지 나왔다.

소문만 무성하던 결과는 결국, 지난 일요일에 나왔다. 마사회는 재정위원회를 열어 정기용 기수 6개월 면허정지, 박대흥 조교사에게 과태금 100만원 처분을 각각 내렸다. 승부 조작에 관련한 조사 결과 혐의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승부 회피를 사유로 들어 중징계한다고 밝혔다. 영예 기수가 탔다면 재결도 눈치 못 채고 넘어갔을텐데 수습기수였기 때문에 눈에 띈 걸 갖고 난리법석만 부린 셈이었다. 그렇게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부풀려진 의혹은 해소되지 않은 채 당사자들은 엄청난 처벌을 받았다. 고의성이나 부정경마의 혐의는 없다고 확인하면서도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제재를 내렸다. 특히, 조교사가 관리 책임을 이유로 받은 100만원의 과태금은 초유의 일이었다.  

오히려 칭찬을 받은 건 재결이 아니고 박대흥이었다.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한 그는 기수의 잘못을 통감하고 스승이자 선배로서의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당당하게 나선 것이다. 늘어난 거리와 부담중량을 감안하여 적절한 작전 지시를 한 것이 잘못이라면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떳떳해 했다.

납득할 수 없는 경주 결과의 피해자가 항상 경마팬이었다면 기수와 조교사는 잘못된 경마시행제도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핵심을 짚자. 마사회가 정한 시행규정 가운데 가장 지켜지지 않는 것은 '매 경주 기수와 경주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다.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경제 논리에 배치된다는 논리다. 즉, 고가의 경주마가 상위군으로 승급하면 맞닥트리게 되는 핸디캡 제도는 경주마가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높은 부담중량으로 혹사당해 뼈가 조각나고 반병신이 되어 주로를 떠난 말의 주인이 당신이라면 매 경주 장렬히 전사할 것을 각오하면서 까지 위 조항을 준수하겠는가. 높은 부담중량을 수긍하고 입상함으로써 다음 경주의 더 높은 부담중량을 감사히 받겠는가 말이다.

열악한 경주마 자원 아래서는 능력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의 핸디캡 제도는 결과적으로 무능력마의 터전을 확보하고 능력마의 시행규정 위반을 방임하는 악법이 되어 버렸다. 능력마의 출전을 제한하는 모든 행위는 경마의 기본 메커니즘을 위배한다고 세계경마는 훈시하는데도 올해 15.6%를 차지하는 우리 핸디캡 경주의 비율은 2%를 밑도는 미국과 비교할 때 후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제도는 빠져나갈 궁리를 마련해주고 결국 죽어나는 건 마권 사는 경마팬이다. 마권을 사기 위해서는 가는 말과 안 가는 말을 구별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기극을 당해낼 수 없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표시 나지 않으면 넘어가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는 경주마'들에게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행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현실에서 휘두르는 재결의 보도(寶刀)는 녹슨 칼일 뿐이며, 앞으로도 교묘하게 진행될 안 가는 말들의 행진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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