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11/13)  
 대통령의 트로피

로열 애스콧(Royal Ascot) 경마장 전통 세레머니의 백미는 출전마들이 관람대 정면을 지나는 퍼레이드에 있다. 선두에는 여왕 소유의 황금, 보라, 빨간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말들이 나선다. 그러면 관람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성원을 보낸다. 특히, 엡섬 더비(Epsom Derby)가 열리는 매년 6월의 세쨋주 일요일에는 여왕 마주의 복색을 입은 기수가 이끄는 오픈마차로 여왕과 가족을 왕실이 있는 윈저궁에서 그곳까지  인도한다.

왕실의 소유인 애스콧에서 18번이나 우승한 전직기수 피것(Leser Pigott)은 공식석상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때의 여왕은 주로를 달리는 그녀의 애마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라고 기억한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응원하는 모습은 항상 엄숙한 여왕의 사진에 익숙한 국민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오히려 친근감을 주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 왕실의 입장이기도 하다. 서울마주협회 명예회원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은 꿈을 이루지 못한 더비 우승마의 마주가 되기 위해 2005년 엡섬대회 1차 등록에 벌써 소유마 여섯 마리를 신청하는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영국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발전한 경마가 귀족은 마주라는 등식을 거침으로써 상위개념의 신분을 필수로 하는 고급 스포츠로 확산된 것도 따지고 보면 종주국인 영국의 이어지는 노력 덕분이다. 그런 영향 탓인지 대부분의 영연방국가는 여왕의 이름을 건 대회를 유지한다. 최고를 의미하기 위해 일본은 천황(天皇賞)이 등장하고 호주에선 수상(Prime Minister Cup)이, 이탈리아에선 대통령(Premio Presidente Della Repubblica)이 이름을 내놨다. 경마선진국에서 미국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도 마주였으며 조지 부시도 말 목장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별일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이 마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더 큰 뉴스거리일지도 모른다.

이 땅에도 대통령 트로피가 탄생한다. 뚝섬 시절인 지난 1964년 10월18일, 관람대 신축기념으로 '대통령배 상전경마'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니 부활인 셈이지만 당시는 박 전(前)대통령이 만주시절의 술친구인 김덕승 당시 마사회장을 찾은 승마 나들이였으니 경마사적인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신설동 경마장으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 내외가 들르면 즉석에서 경주를 급조하고 이승만박사나 김구선생이 찾으면 즉흥적으로 상장을 만들던 일회성 행사의 연장으로 봐도 무리가 없지 싶다.

하지만, 정확히 40년이 지난 현재, 한국마사회에서 KRA로 CI를 변경하고 '생명과 사랑의 공익기업'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시기에 성사시킨 대통령배 대상경주는 당시와는 엄청나게 변모한 우리 경마의 위상을 대변한다. 대통령배(杯) 혹은 대통령기(旗)라는 국가 원수의 명칭을 사용하는 28번째 정식 종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마산업 종사자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킴은 물론이요, 국가재정과 공익사업에 이바지한 경마팬들에게 국가 최고책임자가 건네는 감사패이자 사은품이지 않은가.

물론, 작년 한 해 동안 세금과 기금 등으로 1조5384억원을 사회에 환원한 국내 최대의 공익기업을 만든 경마이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강 건너편에 서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번 대회는 우리 경마의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제는 대통령을 팔아서라도 좀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자. 그리고 타이틀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빌려주었음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걸맞은 명실상부한 대회로 가꿔 나가자. 언젠가는 경마장을 찾아 직접 트로피를 건네줄 대통령을 보기 위해서라도.





48  아파트와 경마 '쏘스'     장청수 2004/06/19
47  마사회장, 이젠 물러날 때     장청수 2004/06/23
46  ICSC를 아십니까     장청수 2004/07/03
45  개혁이 경마를 살린다     장청수 2004/07/10
44  개처럼 벌어오면 정승처럼 쓰겠다?     장청수 2004/07/17
43  베팅의 재구성     장청수 2004/08/07
42  밸류 플레이(Value Play)     장청수 2004/08/14
41  가는 말, 안 가는 말     장청수 2004/08/21
40  부자와 큰손     장청수 2004/08/28
39  마라토너의 슬픔이 주는 교훈     장청수 2004/09/04
38  축산발전기금     장청수 2004/09/11
37  한 번     장청수 2004/09/25
36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장청수 2004/10/09
35  쓸모없는 국정감사     장청수 2004/10/16
34  '스내피댄서'와 '왕청파'     장청수 2004/10/23
33  굴비상자     장청수 2004/10/30
32  딴 데 가서 알아봐     장청수 2004/11/06
 대통령의 트로피     장청수 2004/11/13
30  아름다운 마주(馬主)     장청수 2004/11/20
29  누가 조교사를 뽑는가?     장청수 2004/11/27

[1][2][3][4] 5 [6][7]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