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11/20)  
 아름다운 마주(馬主)

93년,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2월 15일의 아침이었다. 오전 9시가 채 안됐을 무렵 캘리포니아에 있는 목장(Overbrook Farm)의 관리사는 이제 막 아침 조교를 마치고 들어온 망아지의 굴레와 안장을 벗겨 제자리에 걸고 있었다.

최우수 조교사로 이클립스상을 4회에 걸쳐 받았으며 매년 집계하는 수득 상금 부문에서 14회나 1위를 차지함으로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웨인 루카스(D.Wayne Lukas) 조교사는 마사에서 약간 떨어진 울타리 근처에서 갑자기 소란한 함성을 들었다. 무언가에 놀란 것으로 보이는 밤색 망아지가 요동치는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목장의 수석관리사이자 아들인 제프(Jeff Lukas)가 그곳에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앞발을 든 채 흥분한 망아지의 50야드 쯤 앞쪽에 두 팔을 들고 제지하려 서있었다.

이제 겨우 두 살짜리라곤 하지만 1,100파운드의 몸집이 제프를 밀치며 치고 나갔다. 그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루카스조교사가 911구급대를 부르라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두 눈은 충격으로 초점을 잃고 있었으며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고 있었다. 뒷목 부분을 강타당해 두개골이 골절된 제프는 일단, 산타 애니타(Santa Anita)경마장 주차장으로 옮겨져 헬리콥터 편으로 후송됐다.

상태는 비관적이었다. 병원에서는 살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거의 보름이 돼가도록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제프의 어린 아들은 할아버지인 루카스조교사에게 자기 아빠를 흔들어서라도 깨워달라고 애원했다. 울먹이는 손자를 바라보지 못하던 그는 곧바로 목장으로 달려갔다.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한 말은 총살형에 처하는 미국적 방식이 거행되는 줄 알았던 주위 사람들은 그러나 그 말의 조교를 자신이 전담하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들어야 했다. 마주로부터 받게 될 조교수당이 아들의 몫이라는 점도 추가로.

아직도 종부료가 50만불로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스톰 캣(Storm Cat)의 자마인 타바스코 캣(Tabasco Cat)은 그렇게 불행한 어린 시절의 과거를 가진 전과자였다. 그러나 루카스의 지극한 정성(?)을 듬뿍 받은 그는 이듬해 3세가 되자 삼관마 경주에 출전한다. 진흙탕 불량 주로였던 캔터키더비에서는 힘 한 번 써보지 못했으나 이어 벌어진 프리크니스에서는 우승을 차지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때 그보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병상의 제프가 살아난 사실이었다. 담당의사는 기적이라고 밖에 더 이상 말을 못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타바스코 때문에 일어섰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반신불수였지만 벨몬트의 마지막 경주를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개인통산 4,999번째 우승을 함께한 전설의 기수 팻 데이(Pat Day)는 이번에도 승리를 제프에게 바칠 것을 다짐했고 결국 약속을 지켰다. 마지막 직선주로에 들어서 달리는 그들을 지켜보던 제프는 알아듣기 힘든 아주 작은 소리로, 부상 때문에 자신의 애마인 시비스킷(Seabiscuit)이 워 어드미럴(War Admiral)과의 세기의 대결을 병원에서 지켜봐야 했던 레드 폴라드(Red Pollard)처럼 응원했다.
“어서 달려 캣!”

말과 인간이 펼치는 아름다운 드라마가 우리 경마장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지난 8월 새벽,'트라이엄프'에 기승하여 조교하다가 떨어져 숨진 고(故)유훈기수를 애도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는 해당 말의 마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식 전통에 따르거나 말을 경마장에서 내보내는 최소한의 절차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런 방법이 해결의 전부는 아니라고 여긴 그는,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경마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자신이 가진 마주로서의 전부를 주는 것, 오직 하나. '트라이엄프'가 우승하여 버는 상금을 유가족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고인을 실질적인 명예마주로 추대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칭찬만으론 오히려 송구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러운 모습이다. 저 세상에서나마 못다 이룬 꿈을 펼치라며 헌화했던 많은 경마팬들이 그의 말의 우승을 응원할 때, 유훈 마주 역시 하늘에서 특유의 또렷한 목소리로 화답할 것이 분명하다.
“어서 달려 엄프!”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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