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수(2004/10/30)  
 굴비상자


고려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인 이자겸(李資謙)이 왕위찬탈을 노리다 실패하고 귀양을 간 곳은 전남 영광. 그는 법성포 구수산(九岫山)의 철쭉꽃이 떨어져 바다를 물들일 즈음 올라오는 조기를 그곳의 바람으로 말리고 햇빛으로 익힌 최고의 상품을 왕에 진상한다. 그 맛에 감탄한 왕이 무슨 고기냐고 물었을 때 그는 굴비라 대답하라 일렀다. 비록 실패한 쿠데타의 주인공으로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이지만 외손자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굴비(屈非)의 뜻이었다 한다.

옆구리가 황금색으로 빛나야 상품(上品)으로 친다기에 요즘은, 생선 가게에서 노랑 물감으로 배에 덧칠을 하기도 하는 조기를 소금에 슬쩍 절여 말리면 굴비라 했다. 북상하는 조기떼를 흑산도 근처에서 거르고 연평도에서 다시 한번 잡으면 우리네 여름 식탁은 풍성했다. 그러나 서해 어로저지선이 남하하고 연평도의 어획량이 줄면서 사정은 바뀌었다. 귀한 탓에 이제는 황금 굴비라 부르며, 그래선지 열 마리 한 두름에 최고 200만원을 호가하는 '영광굴비'는 언제부턴가 범죄형 뇌물상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얼마 전 안상수 인천시장은 2억원의 현찰이 든 굴비상자를 받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여동생 집으로 배달된 이 뇌물의 대가성 여부를 놓고 경찰은 일단 안시장을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안시장의 잦은 말 바꾸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지고 뇌물의 개연성을 입증하는 정황들이 밝혀지면서 인천지역의 민심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안상수 시장을 구속 수사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참여연대도 논평을 통해 고위 공직자에 대한 특혜이자, 정치적 고려가 개입된 결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서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의 공정한 법 집행을 촉구했다.

같은 시기에 경마장에도 유사한 사건이 터졌다. 중견인 이모기수가 굴비상자를 전달받은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전후해서 선물을 받은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 싶기도 하지만 사건의 정황이 예사롭지 많은 않다. 굴비와 함께 50만원이 든 봉투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는 게 경찰의 의심이고 배달돼온 상자를 여동생 집으로 다시 배달시켰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이 표면화된 것도 강남 역삼동의 사설 경마조직에서 일하던 운전기사가 조직책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경찰에 제보를 하는 과정에서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굴비상자와 돈봉투를 배달했으며 이모기수가 선물을 여동생집으로 재배달시킨 사실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경찰조사에서 이모기수는 평소 타조 기승을 자주 한 모 조교사에게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경마장의 구조상 조교사가 다른 소속의 기수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흔치않은 일일 뿐더러 돈봉투를 주는 건 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승 기회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수가 조교사에게 전달했다면 모를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마음씀씀이는 아니지 싶다.

물론, 진실을 알고 있는 사설경마 조직책이 검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쪽의 말만 듣고 옳다, 그르다를 판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경마장의 '관습'상 혐의 사실을 벗기 위한 당사자의 명쾌한 해명이 아쉬울 따름이다. 실정법이 재단하지 못하는 혹은, 안하는 경마장의 폐습과 부조리를 흘러간 옛노래처럼 주절거리게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검은 돈과 공정하지 않은 것들의 유혹에 굴비(屈非)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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