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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메일은 워낙 코미디같은 얘기라 우선 영화 '넘버3'의 쌈마이 송강호 버전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옛날에 말이야- 기멩삼이란 분이
계셨어, 기멩삼. 음, 대단한 분이셨지. 평생 맞짱을 뜰 때 상대를 안가렸어. 그 분이 군바리하고 붙었을 때 얘기지. '너 군바리, 씨바
군바리면 다야. 나 기멩사미야, 기멩삼!' 한마디 딱 하고는 뚜벅 뚜벅 걸어가. 그러면 상대는 어, 어 하면서 물러나게 돼있어. 바로 그때 팍
주저앉아서 입을 꽉 다물어 버리셨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밥도 안 먹고 꼼짝도 안 하셨지.
한가지 목표만 정하면 그 순간부터
무념무상, 아! 이 '무념무상'-생각도 안하고 인상도 안쓴다는, 아주 좋은 말이지. 암튼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는 거야, 그냐앙 앉은 자리에서
죽발때리는 거지. 그러면 언제 한방 날아 들어올지 몰라 저 혼자 긴장하고 힘주고 있던 상대는 땀 삘삘 날거 아냐. 땀은 막 흐르고 시간은 쭉쭉
가는데 미칠 노릇이지, 그러면 군바리 짜식이 먼저 쓰러지게 돼있어. 주먹 한번 못 날려 보고 제풀에 픽 쓰러지지. 헛힘 쓰면 먼저 가게 돼
있거든.
이 분이 이런 무념무상의 무대뽀 정신으로 여러 놈 제껴버리고 쌈마이 짱을 먹으신 아주 이-대한 분이시지. 근데 말이야,
이 분도 나이가 드니까 별수 없더구만. 상대를 잘못 고르는 바람에 완전히 박살났어. 왜 그 생각많고 인상 잘 쓰는 애들 있잖아, 학생애들 한테
무대뽀로 덤벼들었다가 개박살나셨지."
김영삼
씨가 도착하기 전부터 교문을 봉쇄한 학생들이 절대 들여 보낼 수 없다며 팔에 팔을 엮었습니다
그러면 전직 대통령인 김영삼 씨가 고려대 학생들에게 망신당한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그에게 악몽같은 기나긴 하루였을
지난 13일의 금요일, 김영삼 씨는 이 학교 행정학과 함성득 교수의 초청으로 대학원 전공수업인 '대통령학' 시간에 특강을 하러 부인 손명순 씨와
대변인 노릇을 하는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 등 측근들과 함께 아침 11시께 학교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정문은 벌써 아침 10 시께 부터
총학생회 소속 1백 여 학생들이 막고 있었습니다. '나라살림 거덜내고 통일염원 재뿌리는 김영삼은 입닥쳐라'고 쓴 현수막을 교문에 매달고서
말입니다.
김영삼 씨는 학생들의 정문봉쇄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자 옛날 잘나가던 시절의 생각만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민생파탄을 초래하고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김 전대통령이 아무런 사죄 없이 고려대에 들어와 강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에 '내가 누군데, 나는 200만 표 이상의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사람이다'는 요령부득의 말로 되받았습니다.
한때
학생들이 뒷문으로 들어온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후문허용'의 뜻을 밝히자 '초청을 받아 왔으니 정문으로 들어가겠다, 내일이고 모레고 기다리겠다'
며 대도무문을 고집했습니다. 담당교수에 이어 김정배 총장이 직접 나서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막고 있어 도저히 강연이 불가능하다'며 완곡히 돌아갈
것을 요청하자 '하버드대, 하얼빈 대 등 외국대학 특강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며 '23일 간 단식한 사람인데 점심 한끼 굶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김영삼
씨는 11시 부터 오후 3시 반까지 차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습니다
아침
11시부터 내내 차안에만 머물러 얼굴이라도 찍으려던 사진기자들 애를 태우던 김영삼 씨가 오후 3시 반쯤 차에서 내렸습니다. 순간 모든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김씨가 학생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자들도 우왕좌왕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던 김씨는 다시 뒤로 돌아 차를 향했고 역시
사진기자들도 취재용 사다리를 어깨에 맨 채 왔다 갔다 '땡칠이'가 되도록 쫓아 다녔습니다. 결국 다리가 아파서 산책하러 나온 김씨를 쫓느라
비지땀을 흘린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과거 야당시절부터 김대중 씨와는 달리 기자들과 유난히 친하고 언론의 동향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던 김영삼 씨가 모습을 드러내며 여유있게 손까지 흔들어 준 것은 조간신문 마감에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말입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이날 김영삼 씨의 말 가운데 압권은 저녁 6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현
대통령인 김대중 씨가 결정되었다는 뉴스에 대한 소감입니다. 6시 라디오 뉴스에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박종웅 의원을 통해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밝혔습니다. 홍콩 느와르의 막을 연 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이렇게 얘기했지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마침내
차에서 내린 김영삼 씨가 이리저리 산책을 하고, 사진기자들은 경호원과 측근들에 둘러싸인 그를 쫓느라 진땀을 흘립니다
아무튼 밤 12시가 다 되어 학생들이 일단 해산한 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김영삼 씨는 상도동으로
돌아갔습니다. 'I will be back'을 외치며. 참, 14 시간 가까이 밥도 안 먹고 버틴 김영삼 씨가 '볼일'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더군요.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나도 몰라-'였는데 지난 16일 상도동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한 자리에서 스스로 털어놓았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경호원이 슈퍼에서 큰 분유통을 갖고 왔더라. 우유통 큰 것 그거 좋데."
그리고는 그날 학생들이 그날 자기를
막은 것은 배후에 있는 '김정일과 김대중의 합작품'이라며 20일 다시 고대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옷도 좀 두둑히 입고, 깡통도 들고'
가겠답니다.
-저 그런데 일대일이 아니라 여러 명하고 맞장 뜰 때는 어떻게 하죠?
-난 한 놈만 패. 백 명이 오든, 천
명이 오든 한 놈만 패!
바야흐로 '고대 앞 습격사건'이 벌어질 판입니다.
참, 이 얘기를 들은 고려대 총학생회는 17일 밤
김영삼 씨의 습격에 대비한 회의를 열어 기존의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번에는 저지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과연
김영삼 씨가 70분의 특강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궁금합니다.
이날의 사건을 보도한 신문에선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고대 앞 사건'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은 고려대학교 재단이사장이자 동아일보 회장인 김병관 씨입니다. 이날 오후 3시께 정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 회장은 김영삼
씨 차에서 얘기를 나눈 뒤 학생들 앞에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재단이사장이다. 김 대통령을 사무실로 모셔가 차 한 잔 대접하겠다'며
나름대로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걸어서 들어가라'는 학생들의 대꾸에 '걸어서 학교에 들어간 적이 없다'며 버티다 쪽문을 통해 혼자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을
설득하지 못한 김 회장이 정문을 등지고 돌아 섭니다
주인공은 사라지지 않는
법. 김 회장은 4시께 다시 정문으로 나와 '고려대는 민족대학, 동아일보는 민족신문. 김 대통령을 동아일보로 모신다, 이상.' 하고는 다시
김영삼 씨 차에 올라탔습니다.
30여 분 뒤 차에서 내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김 회장은 "98년 10월 12일 방북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이 하사하신 조선영화음악 시디 가운데 '심장에 남는 사람'이란 노래를 들려주었다, 민족일보인 동아일보로 가시자고 설득했는데 안 가시겠다고
하더라"며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은가..."라며 노래가사를 읇조리더니 안주머니에서 <한겨레> 정연주 논설위원의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글 복사본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리곤 '김 대통령에게도 보여줬다. 동아일보는 디제이 신문이 아니다.
한겨레신문은 조폭들 보고 다 일어나라고 한다. 한겨레 이래선 안된다.'며 횡설수설 끝에 연좌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의 피켓을 양손에 들고 '김영삼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다 학생들이 나가라고 외치고 수행비서와 동아일보 기자들의 만류로 떠밀리 듯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김
회장이 김영삼 씨가 탄 차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그만 돌아가시자'고 설득하자 '이왕 망신 당하는 마당에 내일 <한겨레> 톱으로 나련다.
나도 열두 시까지 여기 있겠다.'며 버티다 한겨레 사회부 기자를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예의 조선영화음악 시디를 틀어 주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차로 다가와 설득한 끝에 5시께 자리를 떴습니다. 김회장은 전날 밤 과음을 한데다 그날은 해장술로 반주를 곁들인 상태였다고
합니다.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는 김 회장과 황당해 하는 학생들의 얼굴,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이 제각각입니다
김영삼 씨도 김병관 씨의 이날 행동에 질렸던지 16일 있은 상도동 간담회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찾아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그 회장한테 술 좀 그만 묵고 다니라 캐라. 대낮에 취해가지고 차안에서 말도 많이 하고. 그래갖고 학교나 회사
운영되겠나. 내 차안에도 술 취해갖고 들어와서 노래듣자고 하든데 생각해봐라. 내가 그때 노래듣게 됐나, 회사 가거든 회장한테 꼭 좀 전해라.
낮에 술 좀 묵지 말라고.'
아무튼 20일에 있을 김영삼 씨의 강연이 기대됩니다.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이메일에는 사회부, 정치부 동료기자가 취재한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겨레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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