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정하는 건 고사하고 그저 부상만 안 당했으면 좋겠어요.”
 돈만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작년 11월에도 척추 2군데가 골절, 석달이나 병원에 누워있었다. 퇴원후에도 후유증이 있을 거라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후유증이 튀어나올지 내심 살얼음판이다.
기수생활 13년동안 병원에 입원한 것만 7번, 바지만 슬쩍 걷어올려도 손가락 중지 길이만한 수술자국이 세군데다. 그외 말에 밟히거나 땅 위에 구른 사고는 숫자를 세기조차 어렵다.
“지금도 한쪽 다리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제대로 뛰지도 못합니다. 한번 다쳐서 병원에 들어갈 땐 다시는 내가 기수생활 하나봐라 싶다가도 며칠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또 맘이 변하니 문젭니다. 다시 말을 타고 싶어지거든요. 앞으로도 탈 수 있는 때까진 계속 탈 겁니다.”
한국경마사 바꿀 역대 최고기록 눈 앞에
‘과천벌의 황제’ 경마기수 박태종(35)
경마팬에게는 그만한 영웅이 없다. 세금과 조기협회비 등 차, 포를 다 떼고도 실수령액 월 1,000만원대. 외형상으로는 3,000만-4,000만원대의 고소득자다. 그간 최우수 기수로 뽑힌 것만 세차례. 수년째 경마계를 독주하다시피 받아온 각종 상장과 트로피는 집안 장식장을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따로 치웠다.
현역 기수 가운데 최다승 기록 보유자다. 지난 7월16일 현재 703승. 이대로만 가면 한국 경마사를 또한번 바꿀 날도 멀지 않았다. 역대 최고기록 722승을 넘어서는 것도 서너달이면 가능. 이 때문에라도 그는 더더욱 뜨거운 인기와 시선을 요즘 과천 안팎에서 누리고 있다.
그에게는 포크레인 기사나 택시운전수만 돼도 더 바랄게 없던 때가 있었다. 충북 진천에서 고교 때까지 자란 그는 성적도 그저그렇고, 숫기도 없는 시골소년이었다. 동네 누나만 와도 얼른 뒷문으로 달아나기 일쑤. 처음보는 여자 앞에서 말 더듬는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키 작은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다 자란 키에도 버스를 타면 손잡이가 잡히지 않아 속이 탔고 자전거를 타더라도 페달이 발에 닿지않아 고생이었다. 고교 졸업후 서울로 올라와 이모집에 얹혀 살았다. 포크레인 기사가 되려고 중장비 학원을 드나들면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이모네 일을 도와 오토바이 배달을 다녔다. 한때는 포크레인 기사의 조수로 일한 적도 있다.
경마기수 얘기를 처음 꺼낸 건 이모부였다. 마침 마사회의 한 지점 식당에 배달을 나간 그가 벽에 붙은 기수후보생 모집 포스터를 보고 그에게 응시를 권유했다.
“제 키가 153cm, 체중은 47kg입니다. 그런데 그때 기수후보생 응시자격이 키 160cm 이하, 체중 48kg이하, 시력 좌우 0.8 이상이었거든요. 합격만 하면 월수입 80만원부터 230만원까지 능력별로 보장된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했지요.
12기 기수후보생 시험을 봤는데 1, 2차 시험후 3차 면접에서 그만 떨어졌어요. 그때 면접관이 ‘경마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서 얼떨결에 그전에 경마장에 놀러갔다가 벽보에서 본 대로 ‘경마는 레저스포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이 저를 비웃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그 때문이었을거예요.”
재수끝에 기수후보생 합격
낙방후 심기일전, 그후 1년간 매일 새벽마다 마포에서 여의도까지 왕복 1시간동안 달리기를 하는 등 노력한 끝에 이듬해 시험에선 무난히 면접까지 통과, 합격통지를 받았다. 처음부터 특출했던 것은 아니다. 기수로 들어간 후 3-4년 동안은 그저 남들 따라가기도 바빴다. 
경마장에선 경마장대로 훈련을 받고 집에 돌아가면 따로 관리사에게 부탁해 만든 모형 목마를 안방에 가져다놓고 틈날 때마다 말타기 연습을 했다. 1시간만 앉아있어도 온몸이 땀 범벅. 팔은 팔대로 고삐를 조이며 흔드느라 힘이 빠지고, 다리는 다리대로 앉지도 서지도 않은 자세로 버티느라 힘겨웠다.
1987년 10월 ‘궁궐’을 타고 첫 경기에 출전할 땐 앞이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당시는 뚝섬에 경기장이 있던 때. 출전 전부터 두근거리던 가슴은 경기가 끝나고서도 진정되지 않았다.
순위권엔 아예 들지도 못했다. 성적은 고사하고 경기후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대기실 난간을 잡고서야 겨우 걸음을 뗄 수있었다. 한참동안 숨이 찰 만큼 경주 자체가 힘들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후 기량은 서서히 상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착순에 드는 빈도가 높아졌고 1착으로 들어서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1994년 최우수 기수 선정, 1995년 한국인 기수 최초로 인도 봄베이의 ARC(아시아 경마대회) 2관왕 석권 등.
그중에서도 기승정지 등 몇가지 우환중에 출전한 작년 코리언더비에서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1등상을 받은 감격은 아직도 절절하다. “사실 운이 좋은거지요. 좋은 말을 배정받으면 성적도 그만큼 좋을 수 밖에 없거든요. 말을 탈 때 가장 기분 좋은 것도 그런 거예요. 기수 자신도 열심히 훈련해서 말에 오르고, 그가 탄 말도 기수 뜻대로 잘 뛰어줄 때, 그 기분이 너무 좋아요.”
말과의 호흡이 가장 중요
경마는 최단 1,000m부터 최장 2,300m를 뛰는 순위경쟁 경기. 길어봐야 1분에서 3분 정도면 끝나는 싸움이다. 순간적으로 소모되는 체력과 긴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발주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신경은 오직 스타트 순간에 쏠려있다.
레이스 중엔 상대 기수의 견제도 바짝 긴장을 몰아온다. 느낌만으로도 기수들간의 팽팽한 신경전을 감지할 수 있다. 경쟁이 극에 달하면 해서는 안될 진로방해까지 빚어지기도 한다. 상대기수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일이다.
이럴 경우 가차없이 기승정지를 당하는 등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치열한 다툼 속에서 4코너를 돌 때쯤 되면 대충 자신의 순위도 감이 잡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의 호흡이다. 판단력이라곤 전혀 없는 말이라도 기억력 하나는 지나치게 좋아 오히려 화근이다. 눈 앞에 펜스가 있든말든 곡선으로 돌아야 할 지점에서 무작정 직진으로 내달리며 펜스를 넘어가는 말이 있는가 하면 전날 훈련도중 한번이라도 장애물에 부딪쳐 본 말은 다음날 아무리 그 장애물을 치워놓아도 동일지점에만 가면 반사적으로 과민반응을 보인다.
기수 3년차에 접어들던 1990년대 초반에도 말의 ‘곤조’를 톡톡히 경험한 바 있다.
경주마로 첫 데뷔한 말을 탔다가 정지해야 할 1,000m 지점에서도 멈추지않고 계속 펜스 쪽으로 돌진, 놀란 그가 서너 차례나 같은 길을 왕복하며 이리저리 고삐를 돌린 끝에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골인지점에서 또다시 말썽을 부렸다. 도착지점에서조차 논스톱으로 달린 것.
나중엔 경기 운영위원까지 쫓아나와 막는 등 대소동을 벌이고서야 500m나 더 간 지점에서 마지못해 멈춰섰다. 진짜 사고는 그 뒤에 일어났다. 몇차례 경주를 거친 후라 얼추 길이 든 줄 알았는데 다른 기수 한명이 그 말에 탔다가 또다시 기습봉변을 당해 결국 경주중 앰뷸런스에 실리는 신세가 됐다.
“성질이 원래 거친 말이었죠. 지금도 그렇게 유독 사람 속썩이는 말이 따로 있어요. 그걸 막자면 매일 조교훈련 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가면서 잘 길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성적뿐 아니라 기수의 안전까지 달려있는, 중요한 문제죠.”
관중 악담도 흘려듣는 여유 생겨
현역 최고의 기수라고 해서 그도 백전백승의 기사는 아니다. 성적이 신통치않게 나오는 날도 적지 않다. 그저 남들보다 우승하는 횟수가 많을뿐이다. 잔뜩 믿고있던 그가 1등을 놓치기라도 하면 관중석에선 어김없이 욕이 날아든다.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려라”는 악담을 바로 코 앞에서 퍼붓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요. 너무 한다 싶어 한마디 대꾸라도 하면 오히려 그게 더 그분들을 화나게 만드는지 옆에 있던 다른 분들까지 합세해서 욕을 하시거든요.
예전엔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들었는데 이젠 하도 듣다보니 미소를 짓기도 하고, 여유가 생깁니다. 기수생활을 하는 동안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일이 있을건데 그냥 좋게 넘겨야지요, 뭐.”
경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승부조작 문제. 그도 유혹을 받아본 일이 있다. 1995년 낙마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40대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만나기를 거절했지만 세번이나 거듭 찾아오는 통에 할 수 없이 병원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중년남자는 거두절미하고 대뜸 흰 봉투부터 내밀며 “한번 손잡고 해보자”고 했다. 경주마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것. 단호히 거절하고 일어섰다. 또한번은 아줌마의 집요한 전화공세도 겪었다. 자신의 동생이 박씨 때문에 돈을 걸었다가 2,000만원을 날렸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아무리 안된다고 해도 전화는 계속 찾아들었다. 지치다 못해 그녀의 부탁대로 대면했을 때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달리 단념시킬 방법이 없을 것 같아 “현찰로 2억원을 주지 않으면 안한다”고 엄포를 놓자 그제서야 돌아갔다.
2,000만원에도 떨던 그녀가 거금 2억원을 낼 형편이 못된다는 걸 미리 짚고 막은 소리였다.
 “기수로서 제일 명심해야 할 것은 외부 사람과 단절될 각오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외부와 접촉하면 자연히 부정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거든요. 저만 해도 집과 경마장쪽 사람들 외엔 거의 외부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의심을 받기 전에 처음부터 나쁜 고객들은 피하는게 상책이고, 항상 자기 관리를 잘 해야만 합니다.”
살 안찌는 체질 덕에 감량고통 없어
2년전 자신의 팬클럽 회원이기도 했던 승마교관 이은주씨(27)와 결혼해 현재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결혼전 연애할 때도 이씨의 묻는 말에 그저 간신히 대답만 했던 순진남이다.
양복이라곤 결혼식때 입어본 것 외에 마사회 창립기념일과 같은 큰 행사때나 어쩌다 입어보는 게 전부다. 술, 담배도 할 줄 모른다. 후보생때는 일부러 술을 배워보려고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셨다가 넉다운된 뒤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체질적으로 덕 보는게 있다면 좀처럼 살이 찌지 않는다는 것. 체중감량 문제로 시달릴 일이 없으니 기수로선 더없는 복이다.
기수 정년이 45세. 조만간 바뀌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박씨는 말을 탈 수 있는 데까지 타고나서 힘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말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 다음엔 조교사로 일하면 된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경마장의 경기는 절대 쉬는 법이 없다. 매주 일요일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나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나오는 박씨. “이번 주도 무사히!” 또 언제 어떤 사고를 만날지 모를 경마장에서 그도 이젠 길이 들대로 들어버린 꼴이다.
주간한국 2000년 7월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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